“이봐. 파이. 오늘은 꼭 대련(對鍊) 좀 해주게. 계속 피하지만 말고.”
“아니, 단장님! 안 바쁘세요? 한 영지의 기사단을 이끄시는 분이 이렇게 놀고 계서서야 되겠습니까! 얼른 가서 일 보세요.”
“허허허. 이것도 업무의 연장선이네. 나의 실력이 늘어야 이 영지의 안전이 더 좋아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제니퍼가 자료 정리를 위해 서재에 틀어박혀 있어서 모처럼 자유 시간이 생긴 파이가 영주 저택 뒤편에 있는 정원에서 나무그늘 아래에서 누워서 쉬고 있을 때 짧은 백발을 한 남자가 다가와 그를 귀찮게 했다. 그는 이곳 알펜 남작령의 유일한 기사단인 ‘알펜 기사단’의 단장 살라드였다. 나이는 50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건장한 체격에 늘 활동적으로 움직였고, 자신을 단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남자였다.
“일 없습니다! 수고하세요~.”
“파, 파이. 이보게. 이런... 다음엔 꼭 해주게!”
“네.. 한 오년 쯤 후에요~”
파이는 재빨리 정원의 나무를 타고 올라가 자리를 벗어났다. 살라드는 따라가진 못하고, 다음에 꼭 대련을 하자는 말만 큰소리로 외쳤고, 파이는 대충 대답을 해주고는 멀어졌다.
“거, 곧 노인네라고 불릴 양반이 힘만 넘쳐서는... 저번에 해주는 게 아니었는데.. 에휴...”
몇 달 전 파이가 ‘암석 트롤’을 상처 없이 잡아왔다는 말을 들은 살라드는 호승심이 일어나 그에게 대련을 요청했다. 당시 영지 사람들과 친해지고자 했기에,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선에서 대련을 하기로 했고, 그 결과 파이가 이겨버렸다. 기사단장임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열심히 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다가 이겼는데, 그 후부터는 시간만 비는 것 같으면 파이를 찾아와 대련을 요청했다.
시기나 질투의 맘은 1도 없고, 영지 내에 자신을 상대해줄 사람이 ‘파이’ 하나뿐이라는 이유였다. 그 뒤에 몇 번 더 해줬는데, 계속 지는 데도, 그는 굴하지 않고 몇 번이고 찾아왔다. 그의 끈질김에 질려버린 파이가 그를 피해 다니고 있는 실정이었다.
-깍깍
“어. 까치야. 오늘은 어디를 갈까? 오랜 만에 둘이 바깥에나 나갈까? 아니다. 마이클 타고(?) 멀리 한 번 나가볼까?”
파이는 어깨에 내려앉은 까치에게 땅콩을 주며 혼잣말을 하다가, 멀리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어차피 제니퍼는 며칠간 두문불출할 것이 분명했기에, 시간도 널널했다. 물론 직속 수행원인 마이클의 시간도 많이 남았다.
“룰루~ 오늘은 자유시간~♬ 말 먹이도 줬고요! 마차도 닦았고요! 이제 바깥.... 뭐냐. 너. 언제 와있었냐?”
“하잇! 오랜 만일세 친구.”
제니퍼와 가장 오래 지낸 마이클이었기에, 그녀가 서재에 정리하러 들어갔다는 소리를 듣고 가장 기뻐했다. 최소 3일은 자유의 시간이 보장 된 것이었다. 그래서 그동안 열심히 이 마을, 저 마을 달린 말들을 씻기고, 먹이도 싱싱한 풀을 베어다가 주고, 마차도 삐까번쩍하게 닦아놓은 상태였다. 놀러 가기 전에 항상 하던 의식 같은 거였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한 방해꾼이 나타났기에, 그의 말투가 띠꺼울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나랑 밥 먹은 애는 누군데 오랜 만이야... 왜? 불안하게 왜 그렇게 쳐다봐!”
“흐흐흐. 동지. 그대와 나는 어차피 한 사람에 매인 운명이 아닌가.”
“그, 그렇긴 하다만...”
야비한 웃음소리를 내며 점점 다가오는 파이에게서 불안함을 느낀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만큼 파이가 다시 다가왔고, 반복되다 결국 마차에 막혀 점점 둘이 가까워졌다.
“뭐, 뭐야! 왜 그러는데?”
“흐흐흐. 우리 밖으로 나가자, 아가씨도 없고 하니까 바람 좀 쐬러 가자고.”
“바람은 너 혼자 가. 오랜 만에 자유시간을 너 같은 사내새끼랑 보내고 싶겠냐!”
“쳇. 매정하고만. 안 되겠다. 아가씨 부르러 가야...”
“잠깐!”
파이가 나가자고 하자, 열을 내며 가기 싫은 티를 내자, 파이는 시무룩한 표정을 짓더니 뒤로 돌아 저택 방향으로 갔다. 아가씨를 부르러 간다는 말에, 마이클은 그를 멈춰 세우고 말았다.
‘이, 이 녀석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야... 하아.. 내 팔자야..’
“아가씨가 나오면 나만 힘드냐? 너도 힘들거든!”
“흠... 친구가 내 맘을 몰라주니, 같이 힘들어지면 더욱 우애가 깊어지지 않을까? 그럼 난 아가씨한테 간..”
“야야! 알았다고! 어디로 가고 싶은데! 딱 오늘 만이다. 내일은 절대 안 돼!”
결국 마이클은 하루를 포기하기로 했다. ‘아직 이틀은 남아있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고선 파이의 행선지를 물었다.
“흐흐흐. 역시 내 동지군. ‘모아 마을’에 가자. 오랜만에 ‘포레도 주’가 마시고 싶다고. 너도 좋아하는 거잖아.”
“모아 마을? 촌장님 뵈러 가려고?”
“어. 날 가장 먼저 반겨 주셨던 분이잖냐. 시간이 난 김에 한 번 들리려고. 좀 데려다 줘.”
“으음.. 그래. 가자. 가. 나도 뵌 지 좀 됐으니까.”
파이는 문득 ‘모아 마을’ 촌장이 떠올랐다. 처음엔 별 생각 없이 바람을 쐴까 했으나, 오랜 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포레도 주’도 좀 얻어 오고 싶었다. 마이클도 가서 인사나 드릴 겸 찬성을 했고, 둘은 마차에 올랐다.
“윽. 갔다 와서 다시 청소 해야겠네. 파이. 너도 도와!”
“어허! 나 같은 고급 인력을 청소에 쓰면 쓰나. 각자의 일 하자고.”
“윽. 상전이냐. 좀 도울 생각 좀 하렴. 동지야!”
“쳇. 좋아. 내가 도울 테니, 너도 몬스터 나오면 좀 도와줘. 한 손으론 힘드니까”
“윽...”
자신은 마차를 몰며 먼지를 맞아가며 가는데, 파이는 안에 들어가서 편하게 갈 생각을 하니 약이 오른 마이클은 그를 마차 청소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몬스터를 같이 잡자는 말에 질색을 했다.
‘그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보다 마차 닦는 게 훨씬 안전하고 좋은 일이지. 암!’
겁쟁이 오브 겁쟁이인 마이클은 자신의 일이 훨씬 좋은 것이라며, 자신의 직업에 대해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곤 파이를 끌어들일 생각을 바로 지워버렸다.
= = =
-다각다각. 히히힝
“파이. 다 왔... 자냐. 하아... 야! 파이!”
“으음.. 음? 읏차! 다 왔냐. 흐아아암~ 역시 넌 마차를 정말 잘 몰아! 어찌나 편하던지 잠이 솔솔 오더라.”
“으그극.. 그, 그래. 마차는 놓고 걸어서 가자.”
마을 동문에도 병사가 있었지만, 둘의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바로 통과를 시켜줬다. 마을 중앙에 있는 촌장의 집으로 바로 갔다. 이곳 촌장은 수아즈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파이가 처음 왔을 때 아들을 맞이하듯이 반갑게 맞아 줬던 사람이었다.
“촌장님~, 촌장님~”
“에헴. 누구슈?”
“저에요. 파이!”
“어! 알았네. 잠시만 기다리게.”
대만 밖에서 파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본 이후 한 번 더 보고 이번이 세 번째 보는 얼굴임에도, 마치 고향 떠나갔다 돌아온 아들을 맞아주듯 달려왔다.
-끼이익
“허허허. 어서 오게나.”
“잘 지내셨죠?” “안녕 하세요. 촌장님.”
“어. 나야 늘상 똑같지 뭘. 허허. 마이클도 왔구나. 어서 안으로 들어오게.”
촌장은 둘은 마당에 있는 평상으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둘이 마실 과일 주스를 가져왔다.
“어쩐 일인가? 아가씨도 없이.”
“하하하. 여유가 생긴 김에 이리 온 거죠. 아가씨가 어찌나 바삐 움직이는 지, 여유가 겨우 생겼어요. 꿀꺽. 크하~ 맛있다.”
“뭐, 제니퍼 아가씨가 다 영지를 위해서 하시는 거니 자네가 잘 보필 해주게.”
“물론이죠. 그러려고 온 거니까...”
주로 촌장과 파이가 이야기를 나눴고, 마이클은 이야기를 조금 듣다가 피곤하다며 마루에 누워 잠을 청했다. 마차로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운전하고 왔기에 피곤할 만 했다.
“이따 갈 때 깨워 줘. 난 여기서 자고 있을 게. 오랜 만에 낮잠이나 실컷 자야겠다. 으아~”
“그래라. 크크 이때 아님 언제 이렇게 자 보겠어. 이따 깨워 줄게”
파이는 마이클을 내버려 두고 촌장과 과일 주스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캬~ 언제 먹어도 맛있네요.”
“허허허. 그럼~ 이 곳 ‘모아 산’에서 나는 과일들은 다른 곳과 달리 맛과 향이 매우 강하거든. 주스든 술이든, 아주 끝내 주지.”
“이것들 팔면 큰돈이 될 텐데요.”
“뭐, 그러고야 싶지만, 어디 ‘모아 산’이 사람을 쉽게 허락하는 데라야지. 그저 산기슭에 자라난 몇몇 나무들에게서만 딸 수 있어서, 양이 많지 않아.”
파이는 촌장이 준 ‘그린 애플’ 주스를 마시며 감탄을 했다. 이 외에도 여러 과일 주스들이 각자의 맛과 향이 뛰어나, 팔면 분명 대박 상품이 될 게 뻔했지만, 팔 만큼의 양을 구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과일을 따자고 병사들을 함부로 동원 할 수도 없었기에, 그냥 가끔 보이는 과일들을 따와서 손님 대접용으로 사용할 뿐이라고 했다.
“흐음..”
파이는 턱에 손을 괴고서 ‘모아 산’쪽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을 했다.
“촌장님 제가 저길 넘어서 왔잖아요.”
“그랬지. 그래서 얼매나 놀랬다고. 허허허 그 무시무시한 ‘터틀 드래곤’하고도 친구라며! 자넨 참 대단 허이!”
“에..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파이의 말을 끊고서 촌장이 다른 이야기를 하려하자, 맥을 끊고서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제가 저기 넘어 오면서 몬스터는 별로 못 봤거든요?”
“그렇지. ‘모아 산’은 몬스터가 많은 곳이 아니야.”
“산세가 좀 가파르고 험하긴 하지만, 못 돌아다닐 정도라곤 생각이 안 드는데, 왜 그렇게 다들 멀리 하는 거예요?”
파이는 전 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모아 산’은 높은 산에 험산 산세 덕분인지 몬스터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단지 암벽이 많고 가팔라 사람이 오다니기가 조금 어렵긴 했다.
“어어. ‘모아 산’에 괴물이 사는 디, 여기저기 자주 돌아다니면서 사람이 들어오면 침입자로 여기고 꼭 생명을 앗아 가서 그려. 그니께. 강한 괴물 몇 마리가 산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여.”
“음? 전 못 봤는데...”
“그건 운이 좋았던 게지. 산이 워낙 높으니께.”
파이는 촌장에게 ‘모아 산’에 사는 몬스터들에 대해 물어봤고, 그는 열심히 설명을 해줬다.
현재 ‘모아 산’에는 알려진 것만 네 마리의 강한 몬스터가 살고 있었는데, 그 외에는 대부분 산짐승들이었다. 불은 눈에 4미터가 넘어가는 덩치의 ‘검은 호랑이’ 한 마리, 울프 산에 사는 ‘암석 트롤’보다 더 강하다고 알려진 ‘절벽 트롤’, 산봉우리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우며 산다는 ‘프테루스’, 염소의 머리와 다리에 인간으로 이족 보행을 하는 ‘바포메트’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헐..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검은 호랑이’와 ‘바포메트’가 있는 것은 의외네요. ‘검은 호랑이’는 보통 밀림지역에서 자리를 잡는데...”
“글쎄. 나도 잘은 모르는디, 원래는 없었다가 한 15년 전 부터 나타났다고 하더라고. ‘바포메트’라는 괴물도 그 즈음에 나타났을 겨.”
“으음. 그 둘의 위치는 확인이 되나요? ‘절벽 트롤’이야 절벽에서 생활하고, '프테루스‘는 산 봉오리에서 살 테니.”
“워낙 여러 군데서 보여서. 다행이 사람들이 밖으로 도망치면 쫓아오진 않는다고 하더라고.”
그 후로도 네 마리의 몬스터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봤고, 촌장은 마을사람들에게 들은 내용을 하나하나 다 알려주었다. 이야기를 다들은 파이는 머릴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생각을 하다가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이야기 감사해요. 제가 한 번 올라갔다 올게요. ‘바포메트’는 저도 처음 이지만, 나머지는 다 잡아본 경험이 있거든요.”
“허미.. 자, 자네. 참말 대단 허이!”
“에이. 제국에선 이 정도는 다들 한다고요. 쉬고 계세요. 참! 갈 때 가져가게, ‘포레도 주’ 좀 부탁드려요! 저 번에 주신 것을 다 먹었거든요.”
“그랴. 준비 해놓을 텐게. 위험하면 바로 내려오라고!”
파이는 촌장의 걱정스런 말에 짧게 대답을 하고선 대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