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오! 이것 봐. 파이. 벌써 이렇게나 올랐어!”
“그게 무슨 그림이에요? 웬 막대기를 이렇게 그렸어요. 가서 그림 그리는 법 좀 다시.. 악!”
“야! 그래프잖아! 그림이 아니라!”
정원에서 쉬고 있던 파이에게 제니퍼가 쪼르르 달려와 종이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각 마을에서 걷어진 세수를 월 단위로 나타낸 막대그래프였는데, 파이에겐 그저 어린애가 장난으로 그린 그림으로 보였다.
“자, 봐바. ‘코넬 항’의 세수가 벌써 세 배로 증가 했고, ‘모아 마을’도 두 배로 증가 했어, 거기다 다른 마을들도 조금씩 증가하고 있고!”
“으음. 이런 걸 봐도... 그냥 세금이 증가 했다는 것만 알겠네요.”
“뭐, 요점은 그거지. 파이가 온 뒤로 영지 세금이 두 배가 넘게 증가 했다는 거야. 히힛! 아이 이쁘다”
“으윽... 왠지 기분이 나쁜데..”
제니퍼는 진짜로 파이가 예뻐 죽겠다는 듯, 그의 머리를 격하게 쓰다듬었다.
파이가 오고 나서, ‘코넬 항’과 ‘모아 마을’에서 벌인 일을 계기로 영지의 살림이 점점 나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코넬 항’에서 벌어지는 상업이 활발해졌다. ‘터틀 드래곤’인 ‘꺼북이’가 ‘코넬 항’ 인근에 자리 잡은 후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빈도가 극히 드물게 되어 어부들의 조업 반경이 넓어져 다양하고 많은 해산물들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두 번 험한 산길을 넘어오던 상단이 방문하는 횟수를 늘리기도 했다.
‘모아 마을’도 ‘모아 산’의 향 좋고 맛좋은 과일들을 맘껏 딸 수 있게 되자, 점점 세수가 늘어나는 추세였다. 주력 상품으로 밀 예정인 ‘과일 주’가 나오려면 아직 몇 달 시간이 필요 했기에, 증가하는 추세가 높지는 않았지만, ‘과일 주’가 팔 만큼 익게 되는 순간 폭발적으로 상승할 것이 예상되었다.
두 마을이 부흥하면서 덩달아 영지 전역의 교류가 가속화가 되었고, 영지 중앙인 ‘알펜 성’의 시장에서 교역이 이뤄지면서, ‘알펜 성’ 자체적인 세수도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그동안 워낙 좋지 않아서 눈에 띄게 증가하는 것일 뿐이고, 곧 정체가 될 거란 말이지...”
“흐음. 그래요? 제가 비싼 몬스터라도 잡아다가 팔까요?”
“에이. 그건 일시적인 거고. 정 급하면 그렇게라도 해야겠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영지 살림을 높이기 위해선 내수로만은 부족하단 말이지... 상단이 더 다양하고 많아지면 좋을 텐데...”
요 며칠간, 제니퍼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상단이 많이 찾아올 수 있을까?’ 이었다. 영지민이 4500여 명 뿐인 영지의 한계 때문에, 일정 수준 이상 올라가면 정체가 될 것이 분명했다.
“상단이 많이 찾아오게 하면 되죠.”
“아! 내가 그걸 몰라? 그니까 어. 떻. 게. 오게 하냐고!”
파이의 심드렁한 말에 제니퍼가 얼굴을 들이밀며 화를 냈다. 파이는 침이 튀는 것을 막으며 살짝 물러나서 대답을 했다.
“으음.. 많이 찾아오려면, 일단 많은 상단에 알려야 하지 않을까요?”
“음. 몇 번 알리기는 했는데, 험하다고 안 온데. 별로 이득이 없다나... 지금 오고 있는 상단도 그냥 보부상 몇 명이 모여서 이동하는 수준이니까.”
“그럼 길을 만들면 되죠. 상단이 잘 오도록 길을 넓히고, 도로도 깔고. 마차가 다닐 수 있게 하면 좋겠네.”
“하아... 이런 바보랑 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알펜 남작령은 산맥에 의해 고립되어 있는 영지였다. ‘돌의 장벽’이라고 불리는 이 산맥은 대부분의 높은 곳들이 바위 지대로 형성 되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몬스터도 많고 산이 험해, 옛부터 만들어진 샛길을 통해 왕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음? 그럼 전에는 어떻게 여행을 나가신 거예요?”
“그때는 길이 있었지... 지금은 없어 졌지만..”
알펜 영지엔 수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길이 하나 있었는데, 계곡과 계곡을 잇는 다리였다. 수백 미터 높이에 세워졌던 다리는 그 옛날 ‘알펜 성’을 지을 때 마법을 세긴 마법사가 지었다고 전해졌는데, 주변에 몬스터도 많았고, 세월이 흘러 위태위태한 상태를 유지하다가, 9년 전 다리가 파괴 된 상태라고 설명을 했다.
“그 다리는 복구하기가 어렵나요?”
“그렇지, 길이가 무려 50미터가 넘는 다리였거든, 거기다, 주변이 몬스터 천지야. 다리가 부서지고 난 뒤, 손을 놓고 있던 사이에 높은 계곡 사이라 그런지, 조류 형 몬스터들이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았거든. 그래서 지금은 아예 없는 샘 치는 중이고...”
“흐으음...”
제니퍼의 말에 파이는 턱을 괴고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딱히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낮은 곳은 없어요?”
“그나마 낮은 곳도 수풀이 우거지고 몬스터 밭이지 뭐. 에휴. 우리 영지는 뭔 놈의 몬스터가 이렇게 많아.”
“덕분에 안전한 것도 생각하셔야죠. 나중에 제국이 쳐들어와도, 여긴 못 넘어 오겠던데...”
“그건, 그렇지만...”
알펜영지가 속한 라엘 왕국은 동부 연합국 소속이었는데, 아라한 제국에서 떨어져 나온 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제국과는 국경선을 두고 대치하는 중이었다. 서로 왕래는 하지만, 세금도 높고, 감시도 심해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로,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무방한 상태를 몇 십 년 째 유지하고 있었다.
“에휴.. 제가 뭐 여기서 생각해봐야 무슨 답이 나오겠습니까...
“응. 기대한 건 아니지만, 하도 답답해서 얘기 한 거야. 지금 성장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란 건 잘 알고 있다고.”
여지가 성장한 것을 좋아 하면서도 얼굴엔 그늘이 져있는 것이 못내 신경 쓰인 파이는 몸을 일으켜 세워 엉덩이를 털었다.
“엣 퉤퉤. 야! 숙녀 앞에서 뭐하는 짓이야!”
“어? 숙녀가 어디.. 악!”
“이게!”
파이가 말하는 도중에 그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은 제니퍼는 콧방귀를 뀌고선 저택으로 씩씩대며 걸어갔다.
“아오.. 아가씨. 저 며칠 나갔다 올 테니까. 얌전히 공부나 하고 계세요~”
“흥! 나가 죽어버렷!”
단단히 화가 난 제니퍼는 저택 문을 닫으며 들어 가버렸고, 파이는 머릴 긁적이다가 걸음을 옮겼다.
-까깍
“까치야. 여자들은 왜 저러냐. 변덕이 아주 그냥... 얌마! 얘기는 좀 듣고 가야지! 씨이..”
파이는 어깨에 내려앉은 까치에게 땅콩을 주며 이야기를 하다가, 말이 끝나지도 않고 땅콩만 받아 날아 가버린 까치에게 욕지걸이를 내뱉었다.
= = =
“뭐, 뭐야 또! 왜...?”
“뭐는 뭐고 또는 뭐냐? 내가 못 올 곳에 왔냐?”
제니퍼와 까치 때문에 상한 기분을 마구간에서 말을 씻기고 있던 마이클에게 푸는 파이였다. 마이클은 파이가 등장 할 때마다 긴장하는 상태로 변했다. 항상 뭔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야. 마이클”
“어. 왜에?”
“가자. 운전해라.”
“아씨..! 방금 씻긴 거 안보이냐? 여기 아직 털도 안 마른 거 안 보여?”
파이가 나직이 그를 부르자, 불안감이 더욱 가중 되었고, 결국 또 나가자는 소리를 했다. 마이클은 방금 씻기고 털을 빗고 있던 말의 모습을 손으로 가리키며 버럭 화를 냈지만, 파이는 뒷등으로도 듣지 않고 코를 후비적거리고 있었다.
“이이...! 에휴.. 미안하다. 친구를 잘 못 만나서...”
“얼렁 연결해~ 언제 아가씨 나올지 모르니까!”
“그래. 가자. 아가씨까지 가면 골치가 네 배는 아프겠지..”
파이가 제니퍼를 들먹이자, 정신이 번쩍 든 마이클은 빠르게 말과 마차를 연결 했다. 제니퍼가 타고 다니는 마차완 달리 크기가 작지만, 속도는 더 빠른 마차로 둘이 다닐 때 주로 타고 다니는 마차였다.
“어디로 가게?”
“호른 마을! 고!”
“이 자식. 그게 운전해주는 사람에게 할 태도냐! 내가 아가씨 하인이지 네 하인인 줄 알아!”
“말이 많다. 아가씨~ 제니퍼 아...”
“간다. 간다고! 이럇!”
-다그닥. 다그닥
마이클은 혹시나 제니퍼가 올새라 빠르게 마차를 성 밖으로 몰았다.
‘호른 마을’은 ‘모아 산’이 있는 산맥을 쭉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타나는 산으로 산 높이 자체는 ‘모아 산’ 보다 높았다. 암벽으로 이루어진 ‘모아 산’과는 달리 ‘호른 산’흑과 나무로 뒤덮인 산이었는데, 뾰족하게 솟은 모습이 ‘뿔’과 닮았다 하여 ‘호른’이란 이름이 붙었다. ‘호른 마을’은 그 산기슭에 자리를 잡은 마을이었다.
“이야~ 산이 멋지네. 구름위로 산이 올라가 있어!”
“음. 라엘 왕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이니까.”
멀리 ‘호른 마을’이 보이고 그 너머로 구름에 가려져 끝이 보이지 않는 높은 산을 보며 파이가 감탄을 터트렸다.
전체적인 크기와 넓이는 ‘울프 산’이 더 컸지만, 높이 자체는 ‘호른 산’이 더 높았다. 그만 큼 경사가 높다는 소리였는데, 이곳엔 육상 형 몬스터는 잘 보이지 않고, 조류 형 몬스터의 서식지로 유명 했다. 조류 형 몬스터 중 드래곤의 피를 이었다는 ‘드레이크’를 제외한 최상위 몬스터인 ‘와이번’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 산이었다.
“으음... 제국에 가면 가끔 ‘와이번 나이트’들을 볼 수 있는데, 나도 한 번 도전 해봐?”
멀리 점처럼 보이지만, 시력이 좋은 파이는 그것이 와이번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입맛을 다시며, 잠시 생각을 해봤지만, 동물 교감으로 가능한 녀석이 아니었다. ‘동물 교감’은 일단 동물과 교감을 하게 해주고, 어느 정도의 대화가 가능하게 해주면서, 호감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는데, 조류 형 몬스터들은 대체로 지능이 매우 낮아 그 효과가 일시적일 뿐이었다. ‘꺼북이’나 ‘고양’이는 원래 지능이 높은 종이었고, 나이를 먹으며 더 뛰어나게 된 덕분에 수호신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에휴. 하여간 새대가리들... 아악! 아파 임마. 너한테 한 소리 아니거든!”
-콕콕. 콕콕
파이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에 내뱉은 말을 까치가 알아들은 것인지, 파이의 머리를 부리로 쪼고는 도망갔다. 그 모습을 마부석에서 본 마이클이 입을 가린 큭큭 거리며 웃고 있었다.
= = =
“정지. 정지하시오. 어! 마이클이네!”
“안녕하세요. 오랜 만에 뵙네요. 레딘 기사님.”
마을 동문으로 향하자, 목책 위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기사가 마차를 세웠다. 제니퍼가 워낙 싸돌아다니는 덕에, 영지 내에 있는 마을 사람들과 안면이 있는 마이클을 기사가 알아보고는 바로 문을 열어줬다.
“아가씨도 없이 여긴 웬 일이야?”
“아. 저 친구가 오자고 해서요. 아가씨 호위로 고용된 파이라고 해요.”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제니 아가씨 호위를 하고 있는 파이라고 합니다.”
“아하! 그 유명한 분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파이의 이름을 밝히자, 기사를 비롯한 주변 병사들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의 소문이 영지 곳곳에 퍼진 탓이었기에, 실제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다. 기사 레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는지, 반가워하며, 악수를 격하게 했다.
“그런데, 호위는 어쩌고 여길 찾아온 건지...?”
“아 예. 호른 산 계곡에 있다는 다리 좀 구경하러 왔습니다.”
레딘은 뭔가 살짝 기대어린 말투로 파이를 보며 물었고, 파이가 단순 관광임을 드러내자, 약간 실망하는 빛을 띠었다. 그는 이 마을 출신으로, 이곳에도 수호신 하나가 생가나 싶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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